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문단 편집) === [[1933년]] ~ [[1939년]]: [[나치 독일|독재 정권]]의 군림 === 비록 힌덴부르크를 구워 삶아 정권을 잡기는 했으나 보수 우파의 후원이 없으면 곧바로 무너질 처지였다. 따라서 히틀러는 재빠르게 정권의 독재화를 추구했다. 파펜은 힌덴부르크를 이용해 히틀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파펜을 제치고 힌덴부르크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대공황 이후 정국 혼란에 진절머리가 났던 힌덴부르크는 독일의 혼란을 수습해나가는 나치당과, 이를 이끄는 히틀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1933년, 히틀러는 집권과 동시에 의회를 해산한다. 그리고 선거를 불과 1주 앞둔 때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벌어졌는데 용의자가 [[네덜란드]] 공산당에 잠시 몸담았던 점이 밝혀졌다.[* [[굽시니스트]]는 '[[독일 국회의사당|저기]]에 불지르고 싶은 마음은 동서고금 누구나 똑같구나.'라는 평을 내렸다. 덧붙여 당시 독일에서 방화 사건은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최고 형량을 사형으로 개정한뒤 법을 '''소급 적용'''하여 처벌하였다. 그 때문에 소급 입법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는 나치당에게 반대파를 공격할 수 있는, 기가 막히게 적절한 건수를 제공했다. 용의자가 얼마 안 가 공산당에서 탈당했었다는 점은 중요치 않았다. 히틀러는 공산당 퇴치를 위한 비상대권을 요구했고,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권한을 발동, 기본권 제한에 동의했다. 공산당은 물론 사민당마저 돌격대에게 대놓고 린치당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의사당 방화가 나치당의 자작극이라 생각했지만, 이후 역사학계에서 연구한 결과 나치당이 개입한 정황은 없었다고 하며, 정신 이상에 걸린 사회주의자가 단독으로 불을 지른 것이라고 한다. 나치에겐 정말로 기막힌 타이밍에 일이 적절하게 터져주었기에 거의 천운이 따랐다고 할 정도.] 히틀러를 조종하겠다던 파펜은 이 시점에 이르러 완전히 정국 중심에서 멀어졌다. 나치는 이 사건의 덕을 크게 보아 의회에서 44.5%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했으나 여전히 과반수에 미달하였으므로 히틀러는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립 정권을 세웠다. 곧바로 히틀러는 행정부에게 모든 입법권을 넘기는 '[[수권법]]'을 세웠는데, 사민당과 공산당의 반대는 예상된 것이었고 따라서 필요한 2/3의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를 받아내고 좌파들을 체포, 차단했다. 수권법 제정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된 나치당은 가톨릭 중앙당은 물론이고 동맹이었던 독일 국가인민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다. 이 당시까지도 최대 정치 세력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방조직들([[국기단]] 등)은 무장 봉기를 준비했지만, 중앙당 지도부가 무기력하게 해산하면서 묻히고 말았다.[* 당시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손잡고 나치에 강경하게 싸웠으면, 히틀러가 순조롭게 집권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의견이 2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당 평당원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큰 근거는 없다. 슐라이허 총리는 몇달 전 사회민주당보다 더한 나치 돌격대 40만과 공산 깡패들의 폭동이 함께 일어났어도 [[국가방위군]] 병력과 프로이센 무장 경찰로 충분히 막았을 거라 판단했다. 사민당의 봉기 계획 자체가 사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프로이센 경찰'이 자기들 편을 들어준다는 전제하에서 짜여진 것인데, 프로이센 주와 경찰이 나치에 완전히 장악당한 시점에서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 마침내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가 1934년 사망하자 히틀러는 자신의 지위를 반영구적인 것으로 만들어 일명 '[[퓌러|총통]](Führer, 지도자 혹은 영도자)' 자리에 올랐다.[* 본디 당의 지도자로서 히틀러가 가지고 있던 '퓌러'라는 직함을, 공식적인 직함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며, 법적으로 대통령에 해당하는 권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의 직위는 공석으로 남았고 권한만 히틀러가 가져간 것이다. 일본에서 번역시에 퓌러와 총리+대통령 직위를 묶어서 총통으로 번역했지만 원래는 각각 다른 직위였다.] 나치는 집권 이후 바로 수용소를 만들었다. 실제로 반대파와 유태인과 [[집시]], [[정신질환자]]나 [[장애인]] 등을 죄다 수용하고선 그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서 조직적인 학살 계획을 세우는 등 그야말로 권력욕에 극에 달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편으론 강력한 권력과 사회 안정 능력을 본 주위 유럽 국가들은 이를 부러워하며 나치당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차대전 승전국인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만약 우리가 독일 처지였으면 히틀러 같은 인물을 바랐을 것'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고,[* [[U보트]] 부대장, [[독일 해군]] 총사령관에 이어 히틀러 자살 후 대통령을 지낸 [[카를 되니츠]] 원수는 자신의 전쟁 회고록에서 처칠의 이 말을 인용하며, 당시 [[독일]] 국민의 [[히틀러]] 선택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의 사촌 런던데리 경은 나치를 찬양하였다.] 처칠 전의 수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 또한 히틀러와의 회담 후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이후 온 유럽이 막장 상태였으니 저런 말이 나오게 된 것.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제로 이식된 [[민주주의]]가 민족 분열을 조장하는 체제라고 주장하며, 집권 이전부터 그 폐지를 주장해 왔다. 대신 하나의 총통을 우두머리로 하는 단결된 유기체적 민족 집단화를 꿈꾸었다. 자연히, 두뇌에 해당하는 총통과, 그 명령을 하달하는 신경에 해당하는 관료의 관계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하관계적 [[관료주의]]와 [[나치당]]의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보수적인 관료들이 공무원들로서 질서와 안정을 추구한다면 나치 당원들은 급진적인 민족주의로 무장한 정치 집단이기 때문. 히틀러가 총리로 집권했던 초기만 해도 정부 내각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관료 집단이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나치 집권 이후 일부 장관직이 나치당원에 넘어가고 정부 조직 곳곳에 나치당원이 침투했음에도 기존의 관료 조직과 보수주의자들은 막강한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히틀러 역시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원했기에 이러한 국가 관료 조직을 유지, 강화한다. 특히 대표적인 관료 집단인 독일 군부 역시 히틀러는 손을 대지 않고 철저히 보호해 준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소련에서처럼 당이 관료들을 향해 [[스탈린]]식의 정치적 [[대숙청]]이 일으키거나 당에서 군부에 나치즘을 신봉하는 [[정치장교]]를 파견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는 자신이 권력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던 당내 좌익 급진 세력을 날려버리기로 결심했다. 히틀러는 집권 직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치 당원과 나치 이데올로기를 군과 관료 조직에 침투시키는 데 앞장섰던 [[돌격대]]와 그 대장 [[에른스트 룀]][* 제2혁명을 주장하며 돌격대 봉기를 역설했고, 종전의 귀족적 군대를 대체하고 민중적 돌격대를 민족국가의 무장력으로 내세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도 이런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면 이미 갈아탄 상태였다.]도 당의 호위 조직인 [[SS]]를 동원해 제거해 버렸다. 이것이 [[장검의 밤]]이다. 즉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당원들이 정치적 이유로 국가 공무원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것은 억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틀러 역시 언제까지 국가 관료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였다. 국가 관료들은 대체로 [[히틀러]]의 의지에 순응했지만 그들 나름의 논리와 법과 절차를 고수하고는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 모든 공적인 행정 절차와 법 위에 서고자 했고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행정부의 기능마저 약화시키기로 결심한다. 결국 1930년대 후반에 이르자 히틀러는 기존 관료들을 놔두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하위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직책을 맡기고 특수 조직을 위임하면서 기존 관료들이 갖고 있던 온갖 권한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일례로 경제 전문가였던 재무부 장관 샤흐트을 냅두고 헤르만 괴링에게 [[4개년 계획]]을 맡긴다던가, 행정 전문가였던 내무부 장관 프리크를 냅두고 친위대장 힘러에게 [[게슈타포]]와 경찰 조직을 주기까지 하였다.[* 유태인 학살 당시 [[SS]] 와 [[게슈타포]] 두 조직이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었던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지도자의 의지를 대변하는 부총통실과 [[마르틴 보르만]] 등의 비서진들이 권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급기야 1938년에 이르러서는 구 관료주의적 성향의 장관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하고,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당 관료들이 수많은 직책을 겸직해 가며 모든 걸 해먹게 된다. 여기에는 군부도 예외가 아니라서,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터지자 히틀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존의 군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많은 수의 장성들을 물갈이한다. 여기서 괴링은 원수가 되어 군에서 가장 높은 직급을 차지하고 참모총장에는 말 잘듣고 무능한 [[빌헬름 카이텔]]이 임명된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나치당]]도 보수적인 관료주의자도 아니었다. [[괴벨스]]를 위시한 나치당은 국가의 [[나치]]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선전 기관으로 자리매김했고, 국가 조직은 히틀러의 명령을 실행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사실상 히틀러의 수족과 다를바가 없게 된다. 한편 총통과 그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소수의 나치 당원들은 히틀러와의 관계를 이용해 국가의 온갖 권익을 얻어 히틀러와 함께 국가를 좌지우지한다. 이들이야말로 최후의 승자인 셈. 결국 이러한 교묘한 술책 덕분에 영화 《[[다운폴|몰락]]》에서 볼 수 있듯 전쟁 말엽에 히틀러가 신경쇠약으로 맛이 가도 주변 관리들은 아무도 반기를 들지 못하고 독일이 망할 때까지 그에게 복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